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와할랄 네루 (문단 편집) == 생애 == [[알라하바드]]에서 부유한 [[브라흐민]] 가문에서 출생하여[* 그냥 엘리트 가문 정도가 아니라 [[카스트]] 제도상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흐민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카슈미르 펀디트 출신으로 신라로 치면 [[성골]] 수준이다. 그런 최상위 가문 사람이 영국으로 치면 노동당에 가입한 셈이니 재미있는 부분이다.] 15세 때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의 최고 사립 학교인 [[퍼블릭 스쿨]]의 일각인 해로우 스쿨과 역시 최고 명문인 [[옥스브릿지]]에 해당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였다. 그 이후에 변호사 일을 하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마하트마 간디]]에게 감명을 받아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16년 간디의 영향을 받아 그 해 [[인도 국민 회의]]에 참가하였고, 1918년 자치 연맹 간사, 국민 회의 의원이 되었다. 19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피압박국 국민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석. 영국 왕태자의 인도 방문 때 파업 투쟁을 주도하여 1922년~1923년까지 투옥되는 등 독립을 이루기까지 9차례 투옥되었다. 1923년 알라하바드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고 인도 국민회의에 20년 이상을 국민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인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협력하는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다. 1929년 국민 회의파 라호르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비로소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직하고 1942년 영국에 대한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수를 결의하여 간디와 함께 체포되면서 인도 국민을 시름에 빠지게 했다. 출소한 뒤 1946년 임시정부의 부수상 겸 외상이 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인도 제국]]은 [[파키스탄 자치령]]과 [[인도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인도는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했다.[*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공동체지만 이 시기의 자치령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인해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갖는 [[영연방 왕국]]과도 같은 사실상의 독립국가였다. 다만 [[영국 국왕]]을 실권 없는 국왕으로 모시고, 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실권 없는 총독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예 자치령으로 지정하는 법안이 Indian Independence Act 1947이었으니 이름만 자치령이고 독립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 때 네루는 [[총리]] 겸 외상, 연방관계상에 취임하여 [[뉴델리]]에서 아시아회의를 주재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제도에 대한 항전을 재선언하였다. 그리고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을 선포하여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했다. 간디와는 독립투쟁을 함께 한 양대 거두였지만 간디와 다르게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이는 영국에서 발흥한 온건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페이비언 협회]]에 소속되었던 네루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적 사상도 크게 작용했는데, 간디와 달리 네루는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결합하는 사민주의 체제를 지향했으며[* 공산주의도 안좋게 봐서 [[인도 공산당]]을 견제했다.] 1947년 인도 자치령 정부가 수립된 후에 [[카스트]] 제도를 헌법상 폐지하는 등 소위 '네루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카스트 제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이를 막으려는 브라만 계층을 앞세운 간디의 저지를 받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한지 1년 후 암살당하면서 네루에게 힘이 쏠렸었다. 외교적인 중립주의 노선 역시 네루가 이후 인도의 국제관계에 남긴 큰 방향이다. 특히 [[제3세계]]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둥 회의를 주관한 사람 중 하나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생독립국끼리 연대하여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전략을 다졌다. 반면 인접국과의 국경분쟁에는 적극적인 일면을 보여서 [[카슈미르]]에 출병하거나, [[티베트]] 문제로 막판에는 [[중인전쟁|중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네루는 파키스탄의 분리에 공헌한 과오가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이를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다이렉트 액션 데이]] 문서만 봐도 알수 있듯이 당시 인도의 종교갈등은 아주 극심한 상태였고, 이미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다.], 독립했을 당시 문맹률이 80%를 넘고, 카스트 제도가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데다가 인도와 포르투갈, 프랑스가 직접 통치했었던 지역 말고도 수백여개의 토호국이 잔존해있었던 인도에 의회민주주의 제도가 비교적 순탄하게 정착될 수 있었던 것과 절대 다수의 토호국들을 공화정을 채택하면서 비교적 큰 분쟁 없이 통합시켜 인도가 수십-수백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지 않게 된 것도 네루의 업적이다. 특히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 힌두 극단주의를 인도 사회 주류에서 배제하면서[* 힌두 극우파는 1970년대부터 다시 지방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 이들이 포함된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여 1991년 총선에서 아요디아 모스크 파괴사건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으면서 제1야당이 되더니 90년대 중반에 아예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인도 인민당은 여당과 야당을 오가고 있다. 인도내 소수종교인 이슬람교 탄압과 힌두교 권위주의 성향을 보인다고 지적받기도 하는 [[나렌드라 모디]]도 인민당 소속 총리다.] (사실 이는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결정적인 요인이긴 했지만) 인도를 힌두교인"만의" 국가로 만들어내지 않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세속국가로 만들어낸데다가 독재의 유혹에도 빠져들지 않았고, 굳건하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점을 보면 정치적인 능력 하나는 특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인도가 그 이후로도 항상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딸인 [[인디라 간디]]가 강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지만[* 물론 항목에도 있듯 인디라 간디는 초기만 해도 2대 총리인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오히려 네루 후광이 있는 딸을 이용하려는 원로들의 꼭두각시 느낌으로 추대된 총리였다.] 같은 [[인도 제국]] 출신 국가이면서 군사독재에 빠지기도 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나 아예 싱할라족과 타밀족끼리 내전을 한바탕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정착된 [[스리랑카]]에 비하면 안정적인 민주정 체제가 잘 정착했다.[* 사족으로 오늘날엔 상기한 소수종교 관련 문제나 포퓰리즘 정치, 정경유착적 요소 때문에 최대 인구 민주국가라는 명성에는 못 미치는 성숙도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걸 60년대에 사망한 네루한테 탓하는건 좀 비약이 심한 감이 있다. 애초에 인도에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등과 함께 [[카스트 제도]]를 [[헌법]]에서부터 부정한게 네루 시대 일이었다. 당시 인도는 언어, 문화부터 다른 극과 극을 달리던 다민족, 다인종 사회라 사실상 다른 나라들 수십개를 통합하는거나 마찬가지인 기로에 있던 시절이었던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장 왕건만 해도 통합한답시고 호족 가문 수십명과 혼인 관계를 맺은 바 있다.] 한편,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고속 성장까진 아니지만 집권기간 3~5%대 내외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했다. 1950~55년 1차 5개년 당시엔 농업에 집중했다면, 2차는 공업에 집중했고[* 네루는 스탈린식 급진적 산업화 정책을 인도에서 실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계획경제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척결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1, 2차 계획 모두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에 신난 정부는 1960년대 3차 5개년을 실시했고 다시 농업에 초점을 맞췄는데, 안타깝다면 안타깝게도 이 3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1962년 터진 [[중인전쟁]]과 네루가 [[사망]]한 이후긴 하지만 65년 터진 [[인도-파키스탄 전쟁]], 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등 당시 남아시아 일대가 휘청일 정도의 대외적 혼란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여파가 컸다. 또 인도 통합 초기인지라 분열의 단초가 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주저해서 이 부분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기술 교육을 중시해, 1951년 [[인도 공과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인도에 기술 인재가 많다는 인상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 1964년 5월 27일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